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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징조들]그냥 개와 함께하는 인류의 종말


  나는 동양철학이 존재한다는 것 정도만 알고, 서양철학 역시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모르는데다가, 기독교는 물론 천주교, 불교, 원불교 등 온갖 종교란 종교는 모조리 불신하는 아주 평범한 인간이다. 그런터라 선악구도는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 먹었더니 에덴의 언덕인지, 동쪽인지 암튼 그런 곳에서 쫓겨났다더라. 그렇다면 그 선악과 나무는 누가 심어서 걔네를 곤란하게 하는데? 정도의 사고만 하고 있는 내게 이 책은 신세계였다. 물론, 성경은 지식인들의 필독서라고 하지만, 네이버 지식인 축에도 끼지 못하는 나는, 유치원 열심히 다니던 여름 즈음 성경학교에 다녀 본 것이 전부고, 엄마가 보내서 다니기는 했지만 아는 것은 역시 앞 서 말한 정도. 딱 그 수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 덕분에 천사와 악마는 알겠는데 적그리스도는 누구며, 묵시록은 성경과 뭐가 다른데? 그래서 예언을 하고 있는 것은 마녀인지, 신인지, 그렇다면 마녀는 인간인건지, 새로운 개체(?)인건지 혼돈스러운 마음으로 [멋진 징조들]의 책장을 넘겼다.

  수 많은 고민들을 뒤로 하고 읽어내린 [멋진 징조들]은 멋졌다. 시원한 문장과 세상을 비틀어 보는 유쾌한 시선에 빠져서 보낸 즐거운 나날이었다. 활자를 읽으면서 이렇게 즐거운 마음으로 읽어내렸던 것이 언제가 마지막이었던가, 떠올려보니 언제인지도 모를 옛날이다. 

  이 책의 전제는 천사와 악마는 어디에나 있다는 것이다. 그래, 어디에나 있다면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한 광고에서 처럼 평범한 사람에게 붙어 그의 선택권을 좌지우지하는 귓속말이나 하고 있는걸까. 글쎄, 나는 그들을 만나 본 적이 없어서 뭐라고 확답을 내릴 수는 없지만, [멋진 징조들]에 나오는 천사와 악마는 나름대로 인간사에 적응하며 즐겁게 살고 있다. 어쩌면 사람보다 더 사람같은 모습으로, 인생(?)을 즐기고 있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사람만이 갖는 것이라 생각했던 소유욕을 자신의 직업과 취미생활로 승화시키며 사람들 틈에 섞여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보다 몇백년은 뒤떨어진 사고를 하고 있는 자신의 직업군을 한심하게 생각하고 있다. 예를 들자면, 점심시간 45분 동안 센트럴 런던에 있는 모든 휴대전화를 불통 되게 만든 일이 얼마나 사람들을 화나게 만드는 것인지 14세기의 사고방식에 머물러 있는 악마들은 크롤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또한 아지라파엘은 천사지만, 자신이 모시고 있는 신의 섭리를 모두 다 이해하고 있다고 볼 수 없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은 위에서 시키는 일들에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도 자꾸만 의심이 개입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신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천사와 악마는 의심과 욕심따위는 없을 것 같지만, 크롤리에게는 그 무엇보다 아끼는 벤틀리가 있고, 아지라파엘에게는 몇세기를 넘게 모아 온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고서적들이 있다. 이런 그들의 모습은 욕망이라고는 부재할 것 같은 그들의 각박한 세상이 아닌, 온갖 욕망으로 넘쳐나는 인간 세상과 더욱 가까운 듯 하다. 무엇보다 인간 세상에 종말이 오는 것을 악마도 천사도 원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신의 섭리임에도 불구하고, 인간 세상은 너무나도 재미나기 때문에!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그들은 물론, 적그리스도의 애완견(?)의 사고방식 마저 아주 사랑스럽다.

  이 책의 공동 저자, 테리 프래쳇과 닐 게이먼은 장난으로 이 책을 시작했다고 하지만, 이 책은 정말 장난이 아니다. 이들이 알고 있는 수많은 지식을 깔고 수 없이 많은 이야기를 그들만의 유머로 풀어나가는데 거리낌이 없다. 또한 그 유머 속에는 어쩌면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음흉한 시선이 녹아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노스트라다무스는 수많은 예언과 함께 "후세 사람들이여, 그의 휴식을 방해하지 마시오"란 비문을 남겼다. 짧지만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비문을 통해 짐작해 본다. 그는 자신이 남긴 유언이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킬 것인가를,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멋진 징조들]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생각한다. 예언은 암호와도 같아서 예언은 해석하기 나름이고, 세상은 긍정적 사고방식과 부정적 사고방식, 그리고 그냥 이도 저도 아닌 사고가 어울러 질 때야 비로소 '인간이 사는 세상'이 완성된다는 것임을. 하지만 나는 역시 아무 것도 모르다가 종말을 맞는 쪽이 나의 심신 건강상 좋을 것임을 다시 한번 상기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아, 아래는 [멋진 징조들]의 원어 표지라는데, 한국판보다 좀 더 가볍고 코믹하다. 한국책은 어쩐지 미묘한 분위기가 난다면, 아래의 표지는 자신의 역할을 분명히 알고 있는 것 같다고나 할까. 아무튼 닐 게이먼은 역시 좀 짱인듯.

by 블루데이 | 2009/06/01 21:47 | 떨리는 손 끝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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